참교육 학부모신문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김영만 초대 회장 이야기

참교육 학부모신문 | 기사입력 2024/05/10 [15:57]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김영만 초대 회장 이야기

참교육 학부모신문 | 입력 : 2024/05/10 [15:57]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김영만 초대 회장 이야기

 

 


이주영


오늘 이렇게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이윤경 현 회장님한테 해직 교사 백서 편찬 사업에 대한 취지를 말씀드리고, 1989년 해직 교사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셨던 초기 회원들 중에서 한 분 취재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꼭 선생님을 취재해 달라고 추천하셔서 이렇게 왔습니다.

 

선생님이 1989년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결성에 앞장서 주셨고, 창립 초대 회장이시고, 해직 교사와 전교조에 든든한 우군이 되어 주셨고, 참교육 실현을 위한 학부모 운동을 평생 해주시고, 지금도 고문을 맡아주시고, 후배 활동가들한테 많은 도움을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대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녀들이 계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학부모로서 학교 현장에 대한 경험이나 생각을 먼저 말씀해 주세요.

 

김영만


당시 저는 중·고등학교 학교에 다니는 이남 일녀를 둔 학부모였습니다. 근데 학부모이기 이전에 저는 교육 문제 특히 교사 문제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제가 초중고에 다니면서 이미 겪었습니다. 그것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도 좋았고, 나도 학교생활이 즐거웠기 때문에 그냥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중학교를 갔는데, 마산중학교였지요. 그때 아주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이미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린 교사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나쁘게 된 사례지요. 아주 나쁜 일을 겪었습니다. 

 

뭐 평소에도 신경질이 매우 심했던 담임이었는데. 학교에 사건이 하나 생겼었어요. 그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그때는 새 학기가 되면 학급 미화를 점수로 이렇게 매기는 문화가 학교에 정착돼 있었어요. 교장, 교감이 교실마다 다니면서 심사를 하고, 일등부터 꼴찌까지 순서를 매깁니다. 그러니 신학기 때면 교실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머리를 짜 가지고 교실 미화를 멋지게 하려고 애를 쓰죠. 

 

제가 다니던 마산중학교는 한 학년에 일곱 반에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학원이 없었습니다. 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방과 후에 학교에 그냥 남아서 스스로 자습하고 복습하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 몇 명이 항상 있었어요.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뭐 잘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하고 매우 친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하고 같이 학교에 남아서 공부했어요. 보통 한 6, 7명이 됐는데, 그날은 세 명만 남아서 공부했어요.

 

나는 3학년 1반이었어요. 보통 자기 교실에서 공부하거나 7반에서 했는데, 그날은 몇 명 안 남아서 3학년 7반에서 했어요. 공부하다 조금 쉬는데, 3학년 7반 급장이 갑자기 3학년 4반 교실에 들어가 보자고 했어요. 

 

그날 4반에는 남은 학생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없는데 문이 다 열려 있으니까 3학년 7반 급장이 그 반은 환경미화를 어떻게 했는가? 궁금한 마음에 들어가자고 했던 것 같아요. 그때 환경미화는 각반 급장이 책임지고 솜씨 있는 아이들하고 같이 했잖아요. 3학년 4반 교실로 들어

갔어요. 근데 우리 어린 눈으로 봐도 3학년 4반 교실이 가장 환경미화가 잘 되어 있는 거예요. 담임이 남자 선생님인데도 평소 굉장히 여성적이었고 신경을 많이 쓰는 선생님이셨지요.

 

3학년 7반 급장이라면 전교에서 칠 등입니다. 반 배정을 전교 성적순대로 1, 2, 3, 4, 5, 6, 7 이렇게 돌아가면서 배정했으니까 전교 칠 등이라는 얘기거든요. 이 친구가 갑자기 그 교실에 들어가더니, 낄낄거리더니, 칠판에 그림도 그리고 장난을 치는 거예요.

 

그때 새로 나온 학용품이 있어요. 빨간 심을 종이로 이렇게 똘똘똘똘 말아가면서 베끼는 색연필이지요. 칼로 깎는 게 아니고. 그걸 베끼더니 환경미화를 해 놓은 곳에 낙서를 하더라고요. 그래 내가 깜짝 놀라서 “하지마!” 하고 말렸어요. 다른 친구도 말리고. 그래도 또 그 이상한 짓을 했어요. 그날 그렇게 해 놓고 그냥 나왔어요. 그 다음 날 아침에 가니 전교가 벌컥 뒤집어진 겁니다. 

 

선생님들이 아침에 와서 탁 문 열어보니까, 환경미화 한 벽에 누가 낙서를 했단 말이지요. 근데 3학년 4반 담임 선생님이 아침 교사 조회에 가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누가 학생을 시켜서 자기 반을 훼손시켰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 반 담임을 지목했어요. 하필 그 선생님하고 가장 못 친한 사람이 우리 담임이었어요. 하필이면….

 

그러니까 우리 담임을 딱 지목을 해 가지고 굉장히 공격을 했던 거예요. 조회 끝나고 우리 담임이 교실에 딱 오더니,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교과수업이 들어와야 하는데, 오전 수업 전부 다 아무도 못 오게 했어요. 그리고 “누가 어제 저녁에 학교 마치고 3학년 4반에 가서 그렇게 낙서를 했느냐?”면서 그 범인 색출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지금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데, 그때 범인을 잡아내는 방법이 매우 잔인했어요. 

 

수업을 안 시키고 전부 다 복도에, 2층 복도가 1반부터 7반까지 쫙 길었는데, 그 복도에 모두 꿇어 앉혀놓고 한 명 한 명 따로 교실 안으로 불러 가지고 조사했어요. 교실로 들어가면 무조건 손 펴라고 해요. 그리고 무조건 손을 몽둥이로 때려요. 옛날에 쌀을 한 되 두 되 잴 때 됫박 위로 수북하게 올라온 쌀을 싹 깎는 몽둥이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런 몽둥이를 가지고 때렸어요. 때리니까 엄청나게 아프죠. 그 몽둥이로 무조건 돌아가면서 다 맞았어요.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보통 한 학급에 67명에서 68명씩 있을 때거든요. 우리 반 68명이 그걸 다 맞았는데 범인이 안 나왔어요. 아무도 “누굽니다.” 하고 말하는 아이들이 안 나와요.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면서 다 맞아야 했어요. 그렇게 돌아가면서 오전 내내 계속됐어요. 

 

그러니까 몇 차례를 맞았어요. 몇 차례를 맞다가 보니까, 누군가는 모르는데. 누군가가 말했대요. 김영만이 매일 저녁 오후에 남아서 공부한다고 말한 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에 딱 내가 범인으로 지목이 된 거예요. 내가 완전히 범인으로 찍혔습니다. 어린 나이에 참 이 뺨 저 뺨 돌아가면서 무척 맞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3학년 7반 급장인 송○○가 그랬다고 이름을 대면 끝났을 텐데, 그 이름을 끝까지 안 대서 엄청나게 맞았죠.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그래도 끝까지 친구 이름을 안 댔었어요. 무조건 나보고 “네가 했지?” 했어요. 나는 내가 안 했으니까 “안 했다.”, “나는 안 했다고, 나는 절대로 안 했다고.”만 대답한 거지요. 나보고 “혹시 너는 알고 있느냐?”고 물었거나 “누가 한 일이냐?”고 물었다면 대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나를 범인으로 딱 찍어놓고 무조건 때리면서 네가 했냐고 물으니 나는 끝까지 내가 안 했다고, 절대로 안 했다고 대답한 거지요. 3학년 7반 급장은 내가 그렇게 맞는데도 자기가 했다고 말 안 하고 끝까지 모른 척하고 나서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 사건 범인으로 찍혔어요. 그게 학기 초였거든요. 

 

환경미화 작품에 낙서했던, 내가 그렇게 맞는 데도 끝까지 자기가 했다고 나서지 않았던 그 친구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했어요. 그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가끔 소문만 들었어요. 중앙정보부 차장까지 했고, 서울의 봄 당시 청와대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와 그 친구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그날부터 무조건 종례할 때 들어오면 꼭 그 선생이 하는 방법이 꼭 어떤 경찰이나 안기부가 프락치를 집어넣은 것처럼 했어요. 왜 반장이라든지. 뭐 그런 친구들 시켜서 이름을 적게 해요. 오늘 교실에서 누가 제일 먼저 많이 떠들었다. 옛날 건물은 지금 건물하고 달라서 복도 2층에 서 조금만 움직여도 밑에 교무실에서 들으면 북처럼 아래층이 울렸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쿵쿵 뛰었는지 이런 걸 적어내라 해요.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히 내 이름이 적힐 리가 없는데, 그 담임은 하루도 안 빠지고 내 이름을 불렀어요, 하루도 안 빠지고 내 이름을 불러 가지고 청소시켰어요.

 

나는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이면 곧 고등학교로 올라가야 되는 중요한 시점에 완전히 학교 공부가 멀어진 겁니다. 그때는 마산중학교에서 그냥 마산고등학교로 올라갔습니다. 마산중학교 하고 마산고등학교는 옆에 붙어 있어요. 생각을 해 보니까, 이거 뭐 내가 공부를 계속하기도 싫고, 그만 일찍 취직이나 해서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마산고로 안 가고 마산상고로 들어간 거예요. 뭐 상고에 가니까 나하고 적성이 전혀 안 맞는 학교였어요. 전혀 적성이 안 맞았어요. 나는 주산이 너무 서툴러서 제대로 급수를 따지도 못했고, 하여튼 전혀 적성에 안 맞는 학교를 가서 대충 3년을 다녔었어요. 그러니까 그 중3 때 사건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바뀐 인생이 길게 봐서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잘 된 건지 못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청소년기에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길에서 그 선생 딱 만나면 무조건 주먹으로 패주고 싶었어요. 딱 길에서 만났다면 무조건 쭉 패주고 싶은 마음에 이빨을 부득부득 갈았지요. 그래도 나이가 어리니까 학교에 찾아가서 폭력을 쓸 생각은 못 했어요. 하여튼 길에서 만나기만 만나봐라 만나기만 만나면 내 진짜 내가 맞은 것만큼 두드려 팰 거다. 이 생각을 늘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니까 교사에 대한 원망이 엄청나게 큰 거죠. 성인이 됐을 때까지 계속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뭐 군대 가고 뭐 결혼하고 쭉쭉 사회 생활하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길에서 만나면 패겠다는 생각은 잊고 살았는데. 그래도 늘 그게 떠나지 않았어요. 근데 그 선생님을 지금까지 길에서 안 만났죠.

 

우리 애들을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 이전에 그게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었어요. 그러니까 교사가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내가 몸으로 완전히 당해봤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학교 교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교사들은 먼저 인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교사들이 뭐 집단적으로 교육개혁하고 이런 것까지는 생각을 못 했지요. 그저 내 자식의 교사가 인격이 어떤지에 대해서 늘 관심이 많았었어요. 옛날 내 담임처럼 아주 몹쓸 인간이 아닌가? 그거에만 관심이 많았고 그 정도가 아니라면 뭐 무난하게 그냥 지나가는가? 그랬어요. 또 내가 하는 일들이 있었던 만큼 학교에 잘 안 찾아갔습니다. 그 무렵에는 우리 집사람이나 나나 학교에 안 갔어요. 아예 찾아가서 뭐 선생님을 만나고 이런 거는 아예 안 했습니다. 뭐, 학교에 가면 돈 봉투나 이런 거 드려야 한다는 게 너무 싫고 구차한 거지요. 그래서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애들 학교 교육에 대해서 좀 뭐라 그럴까? 부모로서 신경을 덜 쓴 셈이죠.

 

그러다 교사협의회 관련 교사들을 만났어요. 그 시절에 우연히 〈책사랑〉이라는 민간도서관 만드는 걸 같이 하면서 만나게 되었지요. 이인식 선생님한테 이야기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완전히 개가식 도서관이었어요. 차도 마시고 그랬지요. 그러면서 선생님들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옛날에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런 선생들 만났으면 내가 이렇게 됐을 리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다른 쪽으로 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찻집처럼 자연히 교사들이 거기에 많이 왔죠. 그러니까 거기서 하루는 내년엔가 뭐 교원노동조합으로 바꿀 거라면서 거기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안종복, 이인식, 김용택…. 뭐, 한 네댓 명이 친하니까 앉아서 차 마시면서 같이 얘기를 했어요.

 

내가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말이지? 노동조합을 만들면 학부모들이 이해해 줄 것인가? 그랬지요. 일반인들은 대부분은 노동조합이라고 하면 뭐 그냥 데모나 하고 파업하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교사들이 노동조합한다고 그러면 공부 못하면 공장에 가서 일이나 하라 말하는 학부모들이 거부감을 가질 거잖아요. 그래도 한다면 ‘이제 교사들이 파업하고 그러면 아이들 수업을 못 할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질 건데 그걸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했습니다. 전교조를 꼭 하려면 이전에 작업을 먼저 하나 해야 되는 게 있다. 그러니까 “그게 뭡니까?” 물어봅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지지하는 학부모 단체들을 만들어야 된다. 먼저 학부모를 설득해야 된다. 학부모들을 설득하지 않으면 당신들이 가장 무서운 적은 교육부가 아니고 학부모들이다. 그 학부모들을 이해시켜야 된다고 말했어요.

 

이런 얘기를 잡담처럼 한참 쭉 하다가 마치고 나오니까 누가 나를 따라 나왔어요. 따라 나와 가지고. “선배님, 잠깐 저 좀 보세요.” 하고 불렀어요. 그게 안종복 교사였어요. “왜요?” 하니까 “그 일, 선배님이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게 시초였습니다. 전국 학부모회 시초였습니다.

 

이주영


<책사랑> 방에서 이야기 나누다 학부모회를 만드시게 되셨군요. 그래도 마창 지역만이라면 모르지만 전국 학부모회를 시작하기는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먼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김영만


 

내가 뭐 학교에 들락날락한 사람도 아니고 잘 알 수가 없었지요. 그래도 아버지는 내 또래들이 있으니까 이리저리 모은다 치더라도 어머니들이 있어야 학부모회라고 할 수 있지요. 어머니가 있어야 되는데 그런 조직이 잘 되겠나? 이러면서 내가 웃었습니다. 

 

그때 얘기를 옆에 듣고 있던 우리 지역 이승관 시인이 ‘사랑의 전화’ 김인자 소장을 소개해요, 그래서 바로 같이 갔어요. 이승관 시인도 학부모였으니까요. 김인자 소장님이 그렇다면 어머니들을 찾아보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만난 사람들이 학부모 두 분을 소개받았었어요. 두 분을 소개받으니 힘이 났어요. 그때부터 그럼 한번 조직을 만들어 보자. 그렇게 시작됐어요. 뒤에 보니까 우리하고 비슷한 생각을 전국에서 다 하고 있더라고요.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하잖아요. 어느 시절이 딱 되면 그 시절에 대응하는 생각이 다 비슷했던 모양이에요. 그런 걸 시대정신이라 하는가 봅니다. 우리보다도 뭐 한 1주일 차이로 대구에서도 움직임이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쭉 움직임이 있었더라고요. 어쨌든 전교조보다도 먼저 생겼어요.

 

전교조가 엄청난 탄압을 받기 시작해서 사태가 너무나 긴박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를 도우려면 전국 조직을 만듭시다. 그래서 그 말을 꺼낸 내가 임시 대표로 선출되었어요. 전국 준비위원장이 된 거죠. 창립을 해서 맨 처음 한 일이 촌지, 돈 봉투 없애자는 거였지요. 교사들을 잘 아니까 우리가 교사들한테 학부모들한테 지금 제일 큰 문제가 일단은 교육 개념이고 이념이고 그것보다 먼저 촌지 거부 운동 같이 합시다. 이러니까 교사들이 모두 “좋습니다. 같이 합시다.”라고 했어요. 이렇게 합의를 봤어요. 그때부터 이렇게 돈 봉투 없애기 운동한다는 선전물을 아예 뿌렸습니다.

 

이주영


네, 학부모회에서 교사들에게 돈 봉투 안 주겠다는 운동을 한 일은 전교조 결성에 참여하는 교사들에게 정말 큰 힘을 주었습니다.

 

1983년 이오덕 선생님이 만드신 한국 글쓰기 교육 연구회에서도 회원인 교사들에게 돈 봉투 안 받고 안 주자는 지침을 정했지만 일부만 실천할 수 있었고, 사회에 널리 알리지는 못 했어요. 당시 ‘촌지’라던 이름을 ‘돈 봉투’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오덕 선생님이 처음 시작하셨어요. 그래야 촌지가 촌지(寸志,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가 아니라 교사와 제자와 학부모 사이를 가장 불신하게 만드는 뇌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학부모회에서 이런 문제를 첫 사업으로 정해서 널리 알려주셨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전교조 교사들은 돈 봉투를 받지도 주지도 않는다는 인식을 널리 확산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김영만


그러니까 학부모들이 전교조에 대한 인식이 엄청 좋아졌고, 우리 아이 담임이 전교조 선생이기를 바라게 되었지요, 학부모들이 그랬던 이유가 돈 봉투는 안 받으니까 당연히 인격과 인품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거지요. 마산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그걸 전국 학부모회 만들면서 그걸 맨 처음 사업으로 바로 가져갔어요. 그다음 사업이 육성회비 폐지 운동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보람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보고 당신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회장 하면서 뭐 했냐고 물어보면 “육성회비 폐지한 겁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그거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됐느냐 하면, 전교조가 한참 탄압을 받을 때, 매일 빙모라는 사람이 방송국을 돌아가면서 나와서 전교조를 비난해요. 그런데 보니까 전국 육성회 회장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걸 보면서 “저걸 어떻게 해야 되나? 어떻게 해야 하나?” 했어요. 

 

우리는 단체가 생긴 지도 얼마 안 되고 그러니까 뭐 어느 방송국에서 우리를 불러내 가지고 같이 맞붙이거나 이렇게 안 했을 때입니다. 고민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내가 우리 집사람한테 말했어요. “여보, 우리 애들 공납금 낸 영수증 가지고 있나?” 물었어요. 우리 아내가 그런 걸 잘 모읍니다. 몇 년 치를 모읍니다. 10년 치라도 이런 걸 다 모읍니다. 그걸 잔뜩 나한테 가져왔어요. 그때만 해도 뭐 전부 다 종이에 인쇄해 가지고 이렇게 준 거거든요. 딱 보니까, 어김없이 세 아이 수업료 고지서에 육성회비가 따로 딱 적혀 있더라고요. 그걸 딱 보는 순간에 ‘가만히 있어 봐라?’ 그럼 나도 회원이란 말이잖아요.

 

‘나도 명백하게 육성회비를 낸 회원인데, 이 자식이 언제 누가 만들었기에 전국육성회를 만들어 회장을 해?’ 이 생각에 머리 떠오른 겁니다. 그럼 내가 알았어야 되잖아. 당시로서는 내가 교육에 관심이 엄청나게 있는 사람인데, 전국회를 만들자고 나한테 연락이 온 일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도대체 육성회가 뭔가 알아보니까 육성회 관리 규정이 있더라고요. 그 관리 규정을 보니까 육성회는 절대로 타 학교하고 연대하거나 전국 조직을 만들 수 없도록 돼 있더라고요. 그리고 육성회는 수업료하고 다른 데 수업료하고 육성회비를 함께 내도록 돼 있는 거예요. 이거는 아니잖아요. 수업료는 수업료고 육성회비는 육성회비니까 따로 받아야 되는데 통합 고지서에 넣어서 당연히 내야 되는 거로 되어 있잖아요. 이거는 잘못됐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한 거예요. 육성회와 육성회비가 내 학교 다닐 때도 있었고, 우리 애들 다닐 때도 있었는데, 한 번도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이라는 직무 때문에 그걸 생각하게 된 겁니다.

 

이거 가만히 있어 봐라. 이거 내가 안 뽑은 회장인데, 이 자식이 건방진 자식이 도대체 왜 그동안에 통합 고지서로 우리한테 강제로 내게 했느냐? 강제성이 없는 건데 왜 강제로 내가 했느냐? 이걸 문제 제기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이걸 법적으로 순서대로 밟아가려면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것 같은데, 그래 가지고는 해결이 쉽게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때 ‘아따 딱 좋다. 반환 청구 소송을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이떠올랐어요.

 

그때 천정배가 우리 회원이었습니다. 천정배 씨 부인이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부회장하고 그랬습니다. 천정배 씨 하고 의논을 했죠. 반환 청구 소송하겠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학부모들 몇 명을 뽑아 반환 청구 소송을 한 겁니다. 소송이 딱 제기되니까. 소송이 제기됐다는 자체가 엄청나게 큰 뉴스가 됐거든요. 그게 딱 뭐 뉴스가 되자마자 바로 전국 교장단 회의가 대전에서 열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앞으로 육성회비 안 받겠다는 선언을 해버렸다고요. 우리가 승소하면 각 학교마다 엄청난 돈을 물어내야 하잖아요. 1, 2년도 아니고 수십 년 강제 징수한 거잖아요. 그래서 육성회비가 없어졌지요. 빙○○도 바로 사라졌어요. 어느 텔레비전에도 못 나왔지요.

 

저 개인으로는 그게 엄청 큰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학교에 그런 부조리가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던 걸 찾아내서 없앴으니까요. 그때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해요.

 

이주영


그때 육성회비 문제로 전국 학부모를 대표한다고 거들먹거리면서 전교조를 비난하고 다니던 빙○○가 사라진 건 정말 멋진 한판승이셨습니다. 그 후로 학부모를 대표하는 단체로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가 우뚝 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해직 교사들을 위한 직접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그런 이야기도 더 들려주세요.

 

김영만


그 두 가지 일이 전교조한테 진짜 큰 힘이 돼 준 거고, 이후는 뭐, 지지 성명서 내고 원하면 학교도 찾아가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때 학교에서 교사들 쫓아내고 학부모들을 동원해서 못 들어오게 하기도 했어요. 그때 유독 서울에서 학교 관리자나 육성회 간부들이 끌고 나온 학부모들이 해직 교사들을 밀어내고 그랬어요. 그런 연락이 오면 우리가 가서 해직 교사들을 지지하고, 그런 학부모들에 맞서서 설득하거나 항의하기도 했지요. 저도 그런 일로 서울까지 몇 번 갔습니다. 바깥이 소란스러우니까 학생들이 창문 열고 내려다보고, 우리를 응원하기도 했구요. 그러면 교사들이 교실 창문을 닫고 학교 방송으로 별일 아니라면서 학생들이 나오는 걸 막기도 하더라고요.

 

이주영


그때 1,600여 명 교사들이 해직되는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김영만


그렇게 많은 교사가 대량 해직이 되는 것을 보면서 무척 놀랐습니다. 만일에 10명, 20명, 200명이었으면 그런 건 노조에서 해고되는 걸 봤으니까 그런 정도면 이건 안 되겠다, 지겠다,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숫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이거는 이기는 싸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끝까지 싸우면 복직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교사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문교부가 무리했던 거죠. 노태우 군사정부 진짜 무리했던 겁니다. 예를 들어서 대표 몇 명만, 뭐 몇 십 명만 잘랐으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대량 해직시키는 걸 보고 이거는 끝까지 싸우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사들이 끝까지 할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의외였죠. 그 당시만 해도 교사들은 투쟁보다는 훨씬 더 안정적이고 체제에 순응하는 집단으로 보았던 거지요. 그런데 의외로 교사들이 엄청나게 잘 버티고 잘 견디고 잘 싸우더라고요.

 

그때 그걸 보고 우리나라와 교육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죠. 돈 봉투 없애기가 단순히 부패한 교사와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학부모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교육의 구조 속에서 생긴 일들이거든요.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킨다는 건 교육을 구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되지 않는 일들이지요. 그러니까 교사들이 복직된다는 것은 뭡니까? 잘못된 구조를 바꾸는 거 아닙니까? 그걸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복직되는 거 아닙니까? 또 그거 안 하면 복직할 리도 없는 거고. 그래서 개혁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주영


끝으로 해직 교사들한테 하고 싶으신 말씀 포함해서 마무리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영만


저는 지역 민주화운동 대표를 쭉 맡고 있었습니다. 그 힘을 전교조 지지에 다 실었습니다. 지금 내가 전교조 교사들에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는 거는 시민단체 활동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시민 사회 운동을 하는 분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있습니다. 이제 퇴직도 많이들 하셨을 테니까 좀 더 많은 분이 더 적극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많던 전교조 교사들이 다 어디 갔나?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 최영주 씨 같은 경우 서울지부장 했는데, 참 열심히 했습니다. 내가 지역에 있다가 보니까 소식을 모르겠어요. 그런 분들도 한번 찾아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이주영


네 알아보겠습니다. 소식을 알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영만(참교육학부모회 고문, 글 이주영)

 

녹취기록 2023년 11월 14일. 열린 사회 희망연대 사무실

 

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교사 백서 편찬위원회 엮음, 『교육민주화운동 관련 해직교사 백서 - 1989년 해직교사를 중심으로 -』 3권 열전, 우리교육, 870~882쪽,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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