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은 누구의 시선인가
문해력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문해력’이라는 개념부터 살펴보자.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여기서 던져볼 질문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문해력이라는 능력의 기준은 과연 누구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가? 그 기준을 요구받는 이들은 누구인가?’이다. 물론 문해력은 모든 연령대에서 측정되고 검사되는 능력치라고 생각되지만, 실은 언제나 ‘문해력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누구일까 생각해 보면, 바로 어린 사람들이다.
문해력이 부족한 것이 젊은 세대의 문제라서 그런 것이라는 반박에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 문해력의 기준은 누구에게 맞추어져 있냐고. 문해력은 언제나 비청소년에게 맞추어져 있으며 그 잣대를 청소년에게 들이대며 모자란 능력을 기를 것을 요구받는다. 이런 지점에서 문해력은 너무나도 차별적이다. 게다가 문해력이란 게 과연 개인의 순수한 능력으로 측정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일까? 글과 말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다양한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일이다.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인의 문해력은 정말로 떨어지고 있는가?’ 사실 통계로 보면 그렇지는 않다.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주기적으로 성인 문해능력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비록 이것은 법적 성인에 국한된 결과지만, 우리나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문해능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OECD가 주관하는 조사에서도 한국인의 언어능력은 OECD 평균 이상이라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왜 문해력 논란이 이렇게까지 이슈가 되었을까. 대표적인 논란이었던 ‘심심한 사과’, ‘금일’ 등의 단어를 살펴보자. 이 단어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문어체 등이더라도 알고 있을 수는 있다. 그것이 어쩌면 ‘책을 많이 읽어서’라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다른 가능성을 제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비청소년들의 언어
‘금일’, ‘심심한 사과’, 이런 단어들은 대체로 어디에서 쓰이는지 보면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자리에서 자주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자리에 자주 참여하고 그런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단어들을 몰랐더라도 점차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 청소년들의 자리는 없다. 청소년들은 (대체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격리되고 그들만의 집단을 이루며 살아간다. 그렇게 다양한 자리에 참여할 권리를 빼앗긴 채 사는 청소년들이 비청소년들의 언어를 알고 사용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을까?
청소년들의 신조어, 속된 말 사용이 문제라는 의견도 사실 나이나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어딜 가나 은어나 신조어는 존재해 왔다. 좁게는 회사에서도 그 안에서만 쓰이는 단어들이 있다. 유명한 ‘판교어’라던가, 또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픽스’, ‘컨펌’ 등 실무적인 대화가 아니라면 잘 쓰이지 않을 영단어들도 있다.
청소년들의 신조어 사용이 문제라는 말은 몇 십 년 전 뉴스에서도 존재해 왔다. 지금 비청소년이 되었을 사람들도 ‘담탱’, ‘즐’ 등 당시에는 문제라고 여겨지던 단어들을 사용하며 생활해 왔다. 어느 집단에나 그들만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른 점이 있다는 말이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언어를 적절한 자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인데, 청소년에게 애초에 그러한 역량을 기를 다양한 자리를 사회는 보장하고 있지 않다. 그럼 이것이 문해력의 문제일까, 청소년의 권리 보장의 문제일까.
공격받기에 만만한 사람들
지금까지 봤던 것을 종합해 보면 문해력 저하는 사실이 아닐뿐더러, 비청소년을 기준으로 하여 청소년에게 특정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동차별이고, 애초에 문해력 문제라는 것이 사실은 청소년에게 다양한 사회적 참여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던 문제일 수 있음을 얘기해 왔다. 심지어 은어나 신조어는 청소년들의 전유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 공격받는 것은 청소년이다.
그 이유는 단순할 것이다. 청소년은 만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찰흙처럼 마음대로 주물럭거려서 모양을 바꿀 수 있는 존재, 때로는 벌레처럼 역겹게 여겨지는 존재. 최근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문해력 논란에는 어린 사람들에 대한 차별주의가 서려 있다. 설령 어떠한 문제의 원인이 그들에게 있지 않더라도, 청소년들은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비난하기 쉽고 만만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문해력 저하(사실이 아닐지라도)의 원인이 청소년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아까의 뮤지컬 영상처럼 조롱하는 일이 사회에서 빈번해져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으려면
최근 문해력 저하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육을 바꾸어야 한다느니, 휴대폰 사용을 제한시켜야 한다느니, 책을 읽혀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자주 나오곤 한다. 그러나 청소년이 비청소년들의 언어를 잘 모르는 것은 그들에게 다양한 자리에 참석할 기회를, 시간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으로 청소년들이 책과 같이 정제된 언어 또는 문어체를 덜 접하게 된 건 분명 실제로 있는 현상이고, 그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소년의 전자기기 사용을 규제한다거나, 책을 강제로 읽도록 만드는 것은 사회적 위계에 의한 폭력이나 다름없다. 또 과거에는 소위 말하는 ‘지식인’들의 말만 사회에 널리 퍼졌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언어가 커뮤니티를 통해 퍼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언어를 우리는 받아들이며 융합되는 과정도 필요할 것이다.
재차 말했던 ‘금일’과 ‘심심한 사과’ 등 어렵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이는 언어들은 자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서로를 존중하며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개적인 조롱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격식을 갖추고 존중한다면,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더 많이 마련해 준다면 청소년들도 그렇게 말하고 쓰는 방법을 좀 더 익힐 수 있지 않을까. 비청소년의 시선으로 문해력이란 말을 사용하고 청소년들을 문젯거리 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존중하고 청소년의 사회정치적 참여의 권리를 더욱 보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언어는 상호 교류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름(전북청소년인권모임 마그마) <저작권자 ⓒ 참교육 학부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기획특집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