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의대반 방지법이 시급하다
의대 증원과 지역 인재 전형
의대 정원 확대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 입학전형위원회는 대학 총장, 교육감, 교사, 학부모로 구성되어 있는데 필자도 소속된 이 위원회에서 지난 5월 24일, 각 대학이 제출한 의대 입학 정원을 그대로 승인했다. 원래 이 위원회는 정원을 조정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닌데도 언론은 마치 대교협에서 의대 입학 정원을 증원시킨 것처럼 보도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글에서는 의대 증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의대 증원이 가져온 영향에 대해 짚어 보려 한다.
대교협 위원 중 지방 국립대 총장님이 “지역 인재 전형을 아무리 늘려도 수능 최저를 맞추지 못해 정작 그 지역 학생들은 의대에 입학을 못한다. 의대 증원의 취지에 맞게 수능 최저 기준을 획기적으로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필자도 동의하면서 “더 나아가 지역 인재 전형에서 수능 최저를 아예 없애고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의대에 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5월 30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5학년도 대입전형 시행 계획에 따르면 40개 의대의 입학 정원은 올해보다 1,507명 늘어난 4,565명이다. 농어촌 학생과 기초생활 수급자 등 정원 외 모집 130명을 포함하면 전체 모집 인원은 4,695명이다. 비수도권 의대 26곳이 의무로 뽑는 지역 인재 전형 선발 규모는 지난해보다 888명 늘어난 1,913명으로 집계됐다. 모집 인원의 약 60퍼센트를 지역 인재로 뽑는다. 지역 인재 전형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은 해당 지역 고교 재학생이지만, 현재 중학교 3학년이 치르는 2028학년도 입시부터는 그 지역에서 중·고교를 6년간 다녀야 지역 인재 전형에 지원할 수 있다.
들썩이는 의대 공화국
다니던 대학과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볼 정도로 “의대만이 정답”인 한국에서 지역 인재 전형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은 입시 지형을 흔드는 일이다. 이미 수도권 학원들은 학부모들에게 어느 대학이 유리한지 분석해 주며 지방 유학을 권하고 있다. 4,500여 명의 의대 입시를 위해 전국이 들썩거린다.
그런데, 이 학생들이 과연 지역 의대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 그곳에 남아 있을까.
지역 인재 전형을 늘린 취지는 지역 의료를 살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학원마다 지방 유학 문의가 쇄도하는 현 상황을 보면 이 전형이 수도권 의사가 되기 위한 통로가 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된다. 기업에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이 졸업 후 해당 기업에 몇 년을 의무로 근무해야 하는 것처럼 지역 인재 전형 졸업자의 지역 복무 의무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는 장학금, 수련, 정주 비용을 지원하고 일정 기간 지역에서 근무하게 하는 ‘계약형 지역 필수 의사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지역 의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입학 당시부터 이를 자율이 아닌 의무 사항으로 강제해야 할 것이다.
초등 의대반의 실태
의대 정원 확대가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지난 7월 1일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하 사걱세)’이 ‘초등 의대반 방지법 제정 3만 서명 국민운동’ 캠페인 출범식을 열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초등 의대반 열풍을 법률로 규제하자는 내용이 골자인데, 이에 대해 3만 명의 국민 서명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해 의대 증원 얘기가 나오자마자 대치동을 비롯한 학원 업계에서 초등 의대반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학원마다 ‘초등 선행반’, ‘초등 메디컬반’, ‘초등 M클래스’ 등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초등학생들을 겨냥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수도권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미 초등 의대반 열풍은 초등 학부모들에겐 낯설지 않다. 다만 여건이 되는 부모와 그렇지 않은 부모로 나뉠 뿐이다.
지난해 한 유튜브 채널에서 서울대 의대생이 대치동 학원 초등 의대반을 방문한 '미국 수학 경시대회 푸는 초등 의대 반 수업 현장'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화제가 됐었다. 당시 초등 의대반에 있던 학생 4명 중엔 1학년 학생도 있었는데, 그 학생은 "의사가 왜 되고 싶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웃기만 했다.
116만 명 정도가 시청한 이 영상에 달린 댓글 중 수천 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은 댓글에는 “어린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형편이 안 좋아서 학원 한번 못 다녀 봤는데 저 아이들이 부럽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대치동 학원 원장은 “극성인 부모들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수학의 정석으로 미·적분까지 다해서 보낸다”고 덧붙였다.
초등 의대반이 주는 폐해는 아동 당사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과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준다. 사걱세 자료에 따르면 학교 교과 과정에 비해 최대 14배 빠른 선행으로 진도를 나가는 초등 의대반의 선행 사교육은, 공교육 교실 붕괴뿐만 아니라 아동의 발달단계에 맞지 않은 강요에 의한 아동학대, 사교육비 폭증, 사회 양극화 등을 초래한다.
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 경쟁 교육 시스템에서는 초등 의대반뿐만 아니라 미취학 의대반까지도 등장할 기세다. 초등 의대반에 다니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영어 유치원부터 선행 교육을 시작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초등 의대반을 규제해야 하는 이유
하지만, 이런 현상에 대해 학부모만 탓할 수는 없다. 다른 아이들이 앞에서 뛰어가고 있는데 내 아이만 제자리에 서 있게 할 부모는 드물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부모들의 과도한 교육열을 비난하면서 개인 책임으로 몰아가지만 의대 왕국이 되어 버린 대한민국에서 학부모 탓만 해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이익이 목적인 사교육 기관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손가락질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의대 왕국을 만든 것은 학부모도, 학원도 아닌 우리 사회다. 이제는 교육을 이렇게 황폐화시킨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교육을 수단으로 서열화, 양극화를 조장하고 있는 정부가 책임지고 나서서 해결책을 찾을 것을 촉구해야 한다. 학원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는 교육청, 유아와 초등의 선행 사교육을 눈감아 주고 있는 교육부를 질책해야 한다.
의대 정원을 늘린 것은 초등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더 이상 아이들이 입시제도의 희생양, 실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루빨리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초등 의대반을 규제하는 법안이 만들어져야 죽음의 경쟁 레이스에서 모두가 동시에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아동에게 놀 권리, 쉴 권리,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회장 : 이윤경)
출처 : 카톨릭 뉴스 지금 여기(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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